봉오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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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이 만주 봉오동에서 벌인 전투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3·1 운동 이후 항일 무장 투쟁이 활발해지자,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전투는 독립군의 유인 작전과 지형을 활용한 매복 전술로 진행되었으며,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의 사기를 높이고, 만주 지역 독립운동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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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봉오동 전투 |
시기 | 1920년 6월 6일~1920년 6월 7일 |
장소 | 한국 함경북도 종성군 중국 지린성 도문시 안산, 고려령 중국 지린성 도문시 봉오동 중국 지린성 도문시 삼둔자 |
결과 | 대한독립군과 신민단 독립군 연합군의 승리 |
전투의 부분 | 한국 독립운동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군무도독부 신민단 |
지휘관 및 병력 | |
지휘관 (교전국 1) | 대한군북로독군부 홍범도 최진동 강상모 안무 신민단 이흥수 한경세 |
지휘관 (교전국 2) | 야스카와 사부로 니히미 지로 |
병력 (교전국 1) | 약 1,280~1,300명 |
병력 상세 (교전국 1) | 약 1,220명~1,230명 (대한북로독군부) 약 670명(군무도독부계) 약 550명(대한독립군과 간도국민회계+) 약 60명 (신민단 독립군) |
병력 (교전국 2) | 약 490~500여 명 |
병력 상세 (교전국 2) | 약 240~250명 (일본군 19사단 73연대, 75연대 일부) 일본군 19사단 보병 제73연대 제 10중대 71명 73연대 화기중대 예하 기관총 1소대 28명 19사단 보병 제75연대 제2중대 124명 19사단 헌병대대의 1개 분대 12명 19사단 경찰대대의 1개 분대 12명 남양경비대 1개 중대 약 250여명 |
군대 (교전국 1) | 신민단 예하 독립군 대한독립군 |
군대 (교전국 2) | 제19사단 남양수비대 |
피해 규모 | |
사상자 (교전국 1) | 4명 전사, 2명 부상 (한국 측 기록) |
사상자 (교전국 2) | 157명 전사, 300명 부상 (한국 측 기록) / 1명 전사, 2명 부상 (일본 측 기록) |
2. 배경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는 항일 무장 투쟁에 대한 열기가 높아졌다. 독립군 부대들은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의 군경 시설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1920년 상반기에만 이러한 국내 진공 작전이 30여 차례 이상 이루어졌다.[4]
독립군의 활동이 증가하자 일본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었다.[3] 그러던 중 1920년 6월 4일, 홍범도와 최진동 부대가 삼둔자를 공격한 데 이어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 초소를 공격하여 파괴했다. 이 강양동 전투는 일본군의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3] 이는 곧이어 벌어질 봉오동 전투의 서막이었다.
2. 1. 봉오동 개척
봉오동은 두만강 하구 도문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15] 최진동이 1900년대 초 이곳에 건너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1908년(융희 2년)에는 당시 청나라 지린성 지방관청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직접 개간하면서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10개의 작은 마을에 총 200가구 정도가 사는 비교적 외진 곳이었으나,[15] 최진동은 한국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한인촌을 이루었고, 마을의 행정과 질서를 주도하며 이곳을 자신이 지휘하는 소규모 의병 및 독립군 활동의 기반으로 삼았다. 1920년 무렵 봉오동은 동만주 지방의 중간 규모 한인 교민촌이자 최진동 독립군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봉오동은 상촌(북촌), 중촌, 하촌(남촌)의 세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특히 상촌에는 독립군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15]2. 2. 전투 배경
봉오동은 두만강 하구 도문시에서 약간 떨어진 마을이다.[15] 이곳 지형은 일반적인 만주 지역보다는 다소 굴곡이 있었으며, 당시 10개의 작은 마을에 총 200여 가구가 사는 비교적 외진 곳이었다. 봉오동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의 근거지였고, 그의 가족과 친척들도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봉오동은 남쪽으로 삼둔자 등 독립군의 다른 활동 거점과 연결되었고, 서북쪽 약 40리 거리에는 북로군정서의 본부가 있는 서대파가, 서남쪽 약 16리 거리에는 홍범도와 연합한 신민단의 근거지인 석현이 위치했다. 봉오동 북쪽 약 160km 떨어진 곳에는 만주로 건너온 광복단의 근거지인 대감자가 있었다. 봉오동은 상촌(북촌), 중촌, 하촌(남촌)의 세 자연 부락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들 부락에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특히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봉오동은 1900년대 초 최진동이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이다. 1908년(융희 2년) 최진동이 당시 청나라 지린성 지방 관청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인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한인촌을 이루었다. 새로 형성된 한인 마을에서 최진동은 행정과 질서를 관리했으며, 이곳은 그가 지휘하는 소규모 의병 및 독립군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1920년 무렵 봉오동은 동만주 지방의 중간 규모 한인 교민촌이자 최진동 독립군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간도 등지에서는 국민회군, 북로 군정서군, 서로 군정서군, 대한 광복군 총영 등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 부대는 온성 전투, 삼둔자 전투 등 일본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승리했고, 국내 진공 작전을 활발히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 초까지 독립군의 국내 진입은 32차례 있었고, 이로 인해 34곳의 일본 관공서와 경찰서가 타격을 입었다.[4]
홍범도가 이끄는 북로독군부 제1사령부(다른 이름으로는 간도국민대) 역시 봉오동에 주둔하며 군사력을 키우고 있었다.[15] 1920년 초 홍범도 부대는 병력 약 300명, 군총 약 200정, 권총 약 40정, 총 1정당 탄약 200발 정도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16] 이후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하여 1920년 3월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기관총 7정, 군총 220정, 탄약 18,000발, 권총 22정을 추가로 구입하여 간도의 본영으로 운반했다.[16] 또한 봉오동 전투 직전에는 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약 1.5만원의 군자금으로 군총 300정과 총 1정당 탄약 1,200발을 추가로 확보했다.[16]
독립군의 활발한 국내 진공 작전과 두만강 대안에서의 활동 증가는 일본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일본군은 이에 대한 방어 대책을 모색하고 있었다.[3] 1920년 6월 4일, 홍범도와 최진동 부대의 독립군 일부가 북간도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를 공격하고, 이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던 일본군 1개 소대 규모의 헌병 국경 초소를 공격하여 파괴했다.[15] 이 사건은 일본군의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유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3] 긴급 보고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즉시 1개 중대를 파견하여 반격을 시작했고,[3] 일본 육군 제19사단은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지휘하는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토벌을 명목으로 간도로 파견했다. 봉오동 전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와 일본 정규군 사이에 벌어진 첫 대규모 교전이었으며, 독립군이 큰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였다.[4]
2. 3. 통합 사령부 조직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만주에서는 여러 무장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특히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부터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며 만주 북간도 지역 독립군의 통합과 연합을 추진했다. 이에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교섭하여 연합을 모색하였다. 당시 일본은 3.1 만세 운동 이후 활발해진 만주 지역 독립군의 무장 항쟁에 대응하여 밀정을 파견하고 동태를 살피던 중, 이들의 국내 진공 계획 첩보를 입수하고 1920년 5월부터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1920년 5월 28일,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군무도독부는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라는 단일 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군무도독부의 병영이 있던 화룡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강력한 국내 진입 작전을 계획했다.[17] 당시 통합된 부대의 병력과 화력은 일제 측에 의해 다음과 같이 파악되었다.
구분 | 내용 |
---|---|
총 병력 | 약 1,200여 명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 약 550명) |
화기 | |
기타 장비 | 망원경 7개 |
1920년 만주와 간도 일대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군은 이를 저지하려 했다. 6월 4일, 홍범도, 최진동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 초소를 습격하여 격파했다.[3] 이는 독립군의 국내 진공 작전의 일환이었으며, 일본군의 즉각적인 대응을 불렀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정치·행정과 군사 지휘를 분리하여 운영되었다. 정치·행정의 총책임자인 대표는 군무도독부의 최진동이, 부부장은 국민회군의 군무위원이었던 안무가 맡았다. 통합 부대의 군사 지휘는 의병 시절부터 명성을 떨친 홍범도가 맡았다.[18]
이렇게 대한군북로독군부가 성립되면서 온성군에서 두만강 건너 북쪽에 위치한 봉오동 골짜기 일대에는 700~800명 이상의 대한군북로독군부 병력이 집결했다. 여기에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소속 이흥수(李興秀)가 이끄는 신민단 병력 약 60명과 한경세(韓景世)가 이끄는 1개 소대도 합류하여 봉오동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다.[18]
3. 전투 경과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니이미 지로 중위의 지휘 아래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을 추격했으나, 이는 독립군의 유인책이었다. 독립군은 6월 6일 삼둔자 인근 봉화리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추격해 온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삼둔자 전투).[3]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60여 명이 사살되었고, 독립군 측 전사자는 2명이었다.[3] 삼둔자 전투는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을 명분으로 만주를 침공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삼둔자에서의 패배에 자극받은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지휘하는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파견했다. 이 부대는 6월 6일 밤 두만강을 건너 6월 7일 새벽까지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기습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1]
독립군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봉오동으로 이동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6월 7일 새벽, 봉오동으로 진입하던 일본군 야스카와 부대는 안산과 고려령 일대에서 독립군의 기습 공격과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3] 독립군은 이 초기 교전을 통해 일본군 주력 부대를 봉오동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유인했다.
홍범도와 최진동 등 지휘부는 봉오동 주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 약 1,300명의 병력을 봉오동 골짜기 주변의 유리한 고지에 매복시켰다.[3] 6월 7일 오후 1시경,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의 포위망 안에 완전히 들어서자, 홍범도의 명령에 따라 3면에서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다.[15] 험준한 지형과 소나기, 안개 등 기상 조건은 매복한 독립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15] 3~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3][5] 이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대규모 승리로 기록된다.
3. 1. 선제 공격과 유인책 (삼둔자 전투)
3.1 만세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간도 등지에서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어 활동했다. 홍범도가 이끄는 북로독군부(간도국민대라고도 불림)를 비롯해 국민회군, 북로 군정서군, 서로 군정서군 등 여러 부대가 온성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승리했다.[15][16] 특히 홍범도 부대는 1920년 초 약 300명의 병력과 군총 200정 등으로 시작하여, 3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기관총 7정, 군총 220정 등을 추가로 확보하고, 봉오동 전투 직전에는 국민회의 지원으로 군총 300정과 탄약을 구입하는 등 꾸준히 군사력을 강화했다.[16]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군은 대응에 나섰다. 1920년 6월 4일, 홍범도, 최진동 부대 등 독립군 연합 부대의 한 소대(일부 기록에는 간도 국민회 소속 박승길 지휘 소대로도 언급됨)가 동간도 화룡현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넜다.[3] 이들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고 간도로 복귀했다.[3]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공 작전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이 강양동 전투는 더 큰 충돌의 도화선이 되었다.[3]
강양동 초소의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니이미 지로(新美二郎) 중위가 이끄는 1개 중대를 즉시 출동시켜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는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만주를 침략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다.[3] 독립군 연합부대 사령부는 일본군의 추격을 예측하고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 일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이 이끄는 일부 병력은 고지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이들을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6월 6일 오후,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독립군 유인부대를 따라 매복 지점까지 깊숙이 들어왔다.[3] 약 100m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고지대에 잠복해 있던 독립군 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60여 명이 사살되는 등 타격을 입었다.[3] 독립군 측은 2명이 전사했으며, 인근 마을 주민 9명이 전투 중 유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 삼둔자 전투의 승리에는 이화일 소대장의 유인 작전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3]
삼둔자에서의 패배는 일본군 지휘부를 자극했다. 일본군 제19사단장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 부대로 구성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독립군은 밀정을 통해 이 정보를 신속하게 파악하고,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봉오동 방면으로 이동하여 유리한 지형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며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다.
3. 2. 일본군 월강추격대 편성
함경북도 나남에 사령부를 둔 일본군 제19사단은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고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야스카와 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했다.[19] 이 부대는 두만강 국경 수비 임무를 넘어, 중국 영토인 북간도로 진입하여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일본군 병력은 최소 300명에서 최대 1,000명 규모로 추정된다.
여기에 삼둔자 전투에 참가했던 신미 대위의 신미중대가 합류한 일본군은 야스카와 소좌 인솔하에 6월 6일 종성군 하탄동에 집결하여 같은 날 오후 9시 이후부터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6월 7일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기습하여 단번에 점령하는 것이었다.[11] 일본 추격대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안산 방면을 거쳐 고려령을 넘어 봉오동 입구로 진입했다. 당시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예상하고 봉오동 일대에서 전투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홍범도 사령관은 일본군이 접근해오자 먼저 봉오동 주민들을 안전한 산중으로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한 뒤, 모든 독립군 병력에게 작전 계획을 전달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3. 3. 안산 전투, 고려령 전투
6월 7일 자정부터 새벽 사이, 일본군 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 빈 안산 촌락으로 진입하려 할 때, 고지대에 미리 잠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야스카와 부대는 니히미 지로(新美二郞)가 이끄는 남양수비대 니히미 중대와 합세하여 독립군과 교전했으나,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였고 날씨도 흐렸으며, 무엇보다 독립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며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3]
대열을 정비한 야스카와 부대는 정예 병력으로 구성된 야마자키 중대(山崎中隊)를 앞세워 독립군을 추격했다. 야스카와 부대가 고려령(高麗嶺) 서쪽에 도착했을 때, 북쪽과 북동쪽 고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맹렬한 사격을 받았다. 고지대에서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소수의 독립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안산과 고려령에서의 두 차례 전투에서 일본군은 12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독립군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오히려 독립군 일부 병력이 의도적으로 노출하며 유인하는 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 골짜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3]
3. 4. 독립군의 준비와 재편성
6월 7일 자정 무렵, 안산전투 직후 대한군북로독군부 사령부장 홍범도와 부부장 최진동은 일본군 야스카와 월강추격대대가 봉오동 입구인 고려령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봉오골 주민들을 산악 밖으로 대피시키고 마을을 비운 뒤,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세워 일본군을 속이고 주요 지점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봉오동 골짜기에 있던 독립군 연합부대는 6월 7일 새벽 안산과 고려령에서의 교전 소식을 접하고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명령 지휘체계를 재정비했다. 최진동을 사령관,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삼고, 안무는 사령부 부관, 이원(李圓)은 연대 부관장교로 임명했다. 약 1,300명 규모의 병력은 연대 본부와 6개 중대(또는 대대)로 재편성되었다.[3] 제1중대장(또는 대대장)은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은 강상모(姜相模), 제3중대장은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은 조권식(曺權植)이 맡았다. 비록 형식상 지휘관은 최진동이었으나,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질적인 지휘는 홍범도 장군이 맡았다.[3]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약 40리(약 16km) 떨어진 곳으로,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수십 리에 달하는 계곡 지형이다. 당시 봉오동에는 약 100여 채의 민가가 상촌(북촌), 중촌(남촌), 하촌 세 마을에 흩어져 있었으며, 이곳은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고 최진동의 가족도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상촌은 봉오동의 중심지로 독립군 훈련소가 위치한 곳이었다.[3]
독립군의 작전 계획은 매복을 통해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유인하여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각 부대의 매복 위치는 다음과 같다.
부대 | 지휘관 | 매복 위치 |
---|---|---|
제1중대/대대 | 이천오(李千五) | 봉오동 상촌 북서쪽 끝 |
제2중대/대대 | 강상모(姜尙模) | 동산(東山) 고지 |
제3중대/대대 | 강시범(姜時範) | 북산(北山) 고지 |
제4중대/대대 | 조권식(曺權植) | 서산(西山) 남쪽 나무 숲속 |
연대장 홍범도는 별도로 편성된 2개 중대(또는 대대)를 직접 이끌고 일본군 선발대가 볼 수 있도록 천천히 움직이며 봉오동 골짜기 안쪽으로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소대장(또는 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일부 병력을 주어 고려령 북쪽 1,200m 고지와 인근 마을에 대기시키고,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하며 후퇴하여 일본군 주력 부대를 독립군이 매복한 포위망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했다. 일본군 선발대와 주력 부대가 모두 봉오동 골짜기 안, 즉 독립군의 포위망 안에 완전히 들어오면, 사방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격멸하는 계획이었다.[3] 연대 부관장교 이원은 본부 병력을 지휘하며 탄약 보급과 비상시 퇴로 확보 임무를 맡았다.[3]
3. 5. 제3차 전투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7일, 북로군 제1군 사령부 부장 홍범도는 군무 도독부군,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구축했다. 제3소대 분대장 이화일에게 일본군을 유인하는 임무가 주어졌다.같은 날 새벽, 일본군 제19보병사단 예하 부대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대대가 봉오동 어귀에 접근했다.[20] 오전 6시 30분, 월강추격대대의 전위중대가 먼저 골짜기 입구에 도착했다. 이화일 소대는 이들 선봉 부대와 교전하여 큰 피해를 입히고 물러나게 했다. 이후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남산 중턱에서 일본군 주력 부대를 봉오동 골짜기 안쪽으로 유인했다.[20]
일본군 월강대대는 대오를 정비하여 오전 11시 30분부터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다시 진입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경, 일본군 척후병이 독립군 포위망 안으로 들어왔으나 별다른 저항이 없자, 일본군 본대는 안심하고 봉오동 상촌 부근의 독립군 매복 지점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이때 소나기가 쏟아지고 우박과 짙은 안개가 끼면서 일본군의 시야를 가렸고, 이는 매복한 독립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15]
일본군 주력 부대가 봉오동 상촌에 매복한 독립군 700명[15](다른 기록에는 1,300명[3][5])의 포위망 한가운데에 완전히 들어서자, 오후 1시 홍범도의 사격 개시 명령에 따라 동, 서, 북 3면에서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투는 3~4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오후 3시경, 일본군 야스카와 소좌는 부대를 이끌고 동쪽에서 공격받던 부대를 지원하며 반격을 시도했고, 기관총을 동원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독립군의 효과적인 공격에 강상모가 이끄는 부대는 이들을 격퇴하고 약 1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3][5] 독립군의 기습과 효과적인 공격에 일본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옹성 유원진 방향으로 후퇴했다.[3][5]
4. 교전 결과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고 병력 보강과 군비 확충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반면, 대한제국 말기 의병 수준으로 독립군을 얕보았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은 독립군의 전력을 새로이 평가하고 대규모 토벌 작전을 계획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4]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큰 피해를 입히고 승리했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 이 큰 승리로 인해 봉오동 전투는 '봉오동 대첩'이라고도 불린다.[21] 중국 신문 『상해신보(上海新報)』(1920년 6월 27일자)와 『독립신문』(1920년 12월 25일자)에 실린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서도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명, 경상 100명으로 기록하여 독립군의 압도적인 승리를 전했다. 반면, 일본군은 자체적으로 전사 1명, 부상 2명만을 보고하고 함경북도 온성군 유원진(柔遠鎭)으로 퇴각하였다.[3][2]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소총 160정과 기관총 3정을 노획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승리의 요인으로는 독립군의 높은 사기, 홍범도 등 지휘관의 뛰어난 지휘 능력과 봉오동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전 등이 꼽힌다.[3]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만주 지역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이후 독립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군사 조직 통합 논의와 병력 보강, 군자금 조달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 부대 간에 서로 오인 사격이 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일본군 지휘관들이 문책을 당하고 작전 미숙을 이유로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만주 지역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계획하게 된다.
4. 1. 홍범도 부대의 이동
봉오동 전투 후 독립군 부대들은 더욱 심해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하나씩 둘씩 만주를 떠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22] 당시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 후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파와 혁명을 지키려는 적군파가 싸우고 있었다. 일제는 백군을 지지했으며, 러시아 혁명정부는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 독립군들을 지원했다.[22] 만주에서 무기도 식량도 더 이상 구하기 어려워진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가려는 것은 그곳에서 장기적인 항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22]홍범도 부대는 아직 만주에 남아 있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중 북로군정서 부대를 찾아 화룡현(和龍縣) 청산리로 향했다. 북로군정서는 본래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西大波溝) 산간지대에 있었는데, 일제의 압력에 못 이긴 중국 관청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자 청산리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23]
북로군정서는 당시 만주 최고의 병력과 무장력을 자랑하는 부대였다.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 김규식이 이끄는 보병대 450여 명, 이범석이 이끄는 사관생으로 구성된 연성대(硏成隊) 150명, 기타 약 100여 명 등 총 700여 명의 병력에 전원 일식 보총으로 무장하고 프랑스제 기관총도 한 문씩 갖고 있었다. 김좌진은 안동의 양반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22]
5. 평가
봉오동 전투는 조선과 만주의 국경 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교전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전투로는 첫 번째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가 거둔 승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 승리는 만주 지역 의병 조직의 확대와 참가자 증가를 이끌었으며, 1920년대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4] 그러나 일본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투를 계획하게 되었고,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중국 출병의 빌미로 삼았다.
6. 홍범도 일지
홍범도는 말이 없고 자신의 기분을 표정에 잘 드러내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25] 그는 봉오동 전투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홍범도 일지를 남겼는데, 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홍범도가 단지 봉오동 전투에서 활약한 일자무식의 장군으로만 알려졌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25]
7. 기타
후일 한중 수교 이후 중국 지린성 투먼에 봉오동 전투 기념비가 세워졌다.
홍범도의 일지에 따르면 이 전투에는 3명의 소련 적군(赤軍) 병사들도 참여했다고 한다.[15] 봉오동 전투는 한국 독립군의 선제공격과 유인책, 험준한 지형 및 기후 조건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전투였다. 이후 1920년 8월까지 이어진 소규모 전투와 습격 작전에서 일본 제국 육군은 번번이 북로군에게 패하거나 기습을 당했으며, 결국 1920년 10월 초 독립군 소탕을 명분으로 간도 출병을 결정하고 작전을 개시했다.
2020년 6월,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연설을 하였다.[6]
8. 관련 작품
- 2019년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묘사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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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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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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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鳳梧洞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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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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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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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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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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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한국 독립운동 양대대첩 청산리-봉오동전투 과장”
https://n.new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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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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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 양대대첩 청산리-봉오동전투 과장
https://n.new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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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황군’ 신화 깬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http://sunday.joins.[...]
중앙선데이
201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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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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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문서
활발해진 독립전쟁이 대한민국이 독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으니 봉오동전투는 대한민국을 독립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25]
서적
장부의 굴욕:굴욕에 맞서 승리한 14인의 장부들
위즈덤하우스
2009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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